좋은 날(2023년 3월 22일 수요일)
마음에 들어 했던 서점 알바 계약 기간이 끝나서 백수 상태로 있은지 벌써 3개월. 이제 정말 안되겠다 싶어서 여기저기 지원서를 넣고 면접도 보고 프로베(정식 채용 전 두 시간 정도 일을 체험해 보는 것)도 했지만 잘 안됐었는데, 케이트 블란쳇이 나오는 영화 타르를 보겠다고 옆동네 독립극장에 갔던 것이 시작이었다. 에스반(작은 지역을 오가는 기차)으로 20분? 우반(지하철)으로는 3-40분 걸리는 거리에 있는 소도시에 있는 작은 극장이다. 이 영화관은 꽤 오래전에 엠마 스톤이 나오는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이라는 영화를 봤던 것이 계기가 되어 좋은 인상으로 남아있던 장소인데 왜인지 한동안 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가 이번 영화는 작은 영화관에서 보면 좋겠다 싶어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이다. 이곳은 작은 카페도 같이 있어서 티켓을 사면서 도미는 맥주, 나는 자우어레스 라들러(맥주에 물 섞은 거)를 주문해서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비건 옵션 먹을거리가 꽤 있다.) 상영관도 작았는데 영화가 개봉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날이어서 그런가 관객이 꽤 있었다. 영화 시작 전 광고가 없는 것은 독립영화관의 큰 장점이다. 광고 대신 이 영화관에서 일할 사람을 구한다는 광고를 보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지원하게 된 것이다. 영화 자체는 그냥 그랬지만 케이트 블란쳇을 마음껏 봐서 좋았고, 독일어 더빙으로 본 것이 좀 아쉬웠다. (케이트 블란쳇은 꼭 목소리를 같이 듣고 싶은 배우다.) 그리고 집에 오자마자 영화관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구체적인 구인 정보를 찾았고, 다음날 전화를 걸어 바로 면접 날짜를 잡았다. 핸드폰 너머 목소리가 아주 밝았다.
면접을 보러 거의 처음 해가 있는 낮에 옆 도시를 방문하게 되었다. 보통 영화를 저녁에 봐서 어둑어둑한 거리 풍경만 기억하고 갔다가 깜짝 놀랐다. 역에서 나오니 아기자기한 거리와 오래된 건물들, 작은 상점들이 보였고, 조금 더 가서 본 광장에는 여러 먹을거리와 식료품을 파는 마켓들과 작은 놀이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꺅 소리지르는 소리와 사람들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그날따라 날씨도 좋아서 기분이 확 좋아졌다. 약속 시간보다 15분 정도 일찍 도착해서 주변을 조금 둘러보고, 영화관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발견한 바로 뒤에 있던 공원에 가서 잠깐 새들을 구경했다.
'예쁜 도시구나.'
언젠가 이사갈 집을 구하게 되면 이 동네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영화관 문을 열었다. 오픈 시간은 한참 남았는데 안에는 3명의 사람들이 있었고, 그중 한 여자분이 나를 알아보고 악수를 건넸다. 면접은 편안한 분위기에서 캐주얼하게 이루어졌다. 알고 보니 영화관과 카페뿐 아니라 여름에는 비어가르텐(맥주를 마실 수 있는 야외 테이블) 그리고 우유하우스라는 내가 지나왔던 공원 한편에 있는 작은 카페까지 있었다. 독립 영화관이 살아남는 비결인가 보다 생각했다. 어쨌든 그래서 카페 일과 극장 일을 다 할 수 있어야 하고 주말에도 일을 해야 했다. 뭐, 나는 미니잡으로 주 이틀만 일을 하고 학업과 병행하려면 주말이 오히려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건 상관없었다. 하지만 나는 커피는 종류도 잘 모르고 즐겨 마시지도 않아서 카페 일은 좀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면접 보시는 분(아마도 사장)이 괜찮으면 다음 날 바로 프로베를 해보자고, 그리고 처음에는 우유하우스에서 주로 일을 할 거라고 했다. 우유... 보거나 냄새 맡아본 지 엄청 오래된 것 같지만... 이제 도미도 귀리드링크를 마셔서 정말 소젖을 본 일이 없다는 것을 그 순간 깨달았다. 그리고 여름에는 아이스크림도 판다고 했다. 그렇게 짧게 이야기를 마치고 가는 길에 우유하우스라는 곳을 찾아가 봤고, 엄청 작은 아담한 돌집이었다. 앞에는 10개 정도의 테이블이 있었다. 이 작은 도시와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햇살이 좋아서 그런가, 짧은 거리지만 오랜만에 기차를 타서 그런가, 바로 옆 도시지만 낯선 곳에 와서 그런가 들뜬 기분이 들었다. 사장은 친절했고 일하는 곳 분위기도 좋아 보여서 다음 날 있을 프로베가 기대되었다. 그래도 이제껏 프로베 후에 계약까지 못 간 경험이 있어서 너무 기대하지 말기로 했다. 그리고 집에 가서 텃밭 일을 했다.
따로 유니폼이 있는게 아니어서 적당한 옷을 입고 가야 했다. 있는 옷 중 제일 멀쩡한 옷을 골라서 입었다. 브래지어를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말았다. 편하게 하자. 신발도 그냥 운동화면 되었다. 아침은 전날 끓였던 감자포레수프를 먹었다. 기차 안에서 잠깐이지만 책을 읽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같은 기차로 지원할 학교도 왔다 갔다 해야 하니까 앞으로 자주 탈 기차였다. 버스보다 훨씬 좋았다. 올해 안으로 공사가 다 끝나면 트램이 다시 다니겠지만 앞으로는 시내보다 이웃 도시들을 더 자주 오가게 될 것이다. 오늘도 날씨가 좋았고 오늘도 15분 정도 일찍 도착해서 이번에는 가는 길에 있는 세컨핸드샵이 눈에 띄었다. 들어가서 1유로에 얇은 흰색 반바지를 샀다. 원피스나 긴 반팔 티셔츠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이건 보이지 않았다. 어쩜, 이 상점도 엄청 작았다.ㅋㅋㅋ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서 광장을 한 바퀴 빙 돌았다. 돌다 보니 시내로 가는 길도 찾았다. 앞으로 여기에서 장 봐서 집에 갈 수도 있겠는데? 다음에 도미랑 같이 그냥 산책 겸 도시 탐방 나와도 좋겠다 싶었다. 우유하우스에 가보니 학생인 듯 보이는 젊은 남자가 일을 하고 있었다. 친절한 사람이었다. 오늘 내가 할 일은 아이스크림을 파는 것이 전부였다. 커피 만들기는 천천히 배운다고 했다. 조금 뒤 티나(사장)가 왔다. 일하는 동안 마시는 음료는 전부 무료고 음식은 반값에 먹을 수 있다고 했다. 비건은 무엇이 있는지 알려주면서 자기도 고기는 먹지 않는다고 했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 대부분 베지테리언이라고. 일은 간단했다. 아이스크림 푸는 법, 계산하는 법, 테이블 정리하는 법 등을 배웠다. 서빙은 하지 않았다. 아이스크림을 사가는 손님 대부분은 어린아이들이었다. 어떤 아이는 단골인지 콕 집어서 파란색 설탕가루를 뿌려 달라고 했는데, 핑크색 밖에 없다고 했더니 큰 고민 끝에 핑크색으로 받아갔다. 일은 널널했고 다들 친절했다. 티나는 내가 일을 잘한다고 했고 두 시간 프로베를 끝내고 다음 주부터 바로 앞으로 같이 일하기로 했다. 아싸뵹.
그만 둘 학교지만 그래도 학기 새로 시작하면서 웹개발 수업도 듣고, 알바도 구하고, 날이 따뜻해져서 텃밭 농사도 시작하면서 조금은 우울했던 마음이 다시 펴졌다. 밀린 한국 드라마들 보면서 그리고 도미랑 카드게임하면서 힘든 시간을 버텼다. 지금은 너무 볼게 많아서 문제지만.ㅎㅎㅎ 항상 응원해 주는 도미에게 고마운 마음이 큰 요즘이다. 오늘은 야외 정원 한편에 있는 텃밭 빈 공간을 내가 써도 된다고 허락받아서 거기에 깻잎을 심을 생각이다. 올해는 소소하게 하려고 했는데 결국 또 집에 있는 씨앗들 다 꺼내서 모종으로 키우고 있고, 실내식물들 몇 없지만 분갈이하면서 화분이 늘었다. 선물 받은 식물 하나가 봄을 보지 못하고 죽었는데 그게 안타깝다. 어쨌든 오늘도 요미 한 판 하고, 내일은 샥슈카를 만들어 먹어 봐야지. 그리고 수업 들은 거 복습해 보기. 오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