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스프(2022.02.17.목요일)
오늘은 도미랑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다. 우리는 생활리듬이 너무 다르고 음식 취향도 달라서 보통은 각자 먹다가 어쩌다 타이밍이 맞거나 같이 먹고 싶을 때는 메뉴를 같이 정해서 먹는다. 오늘은 집에 빵이랑 어제 먹고 남은 토마토소스가 있어서 토마토스프를 만들기로 했다. 도미는 오늘 퇴근이 늦을 예정이라 요리는 내가 하기로 했다.
여느 때처럼 수학공부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무언가 꽝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발코니 모서리 한 귀퉁이에 세워둔 나무 막대기가 쓰러져 있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나무들의 머리칼이 무섭게 휘날리고 있었다. 사실 오늘 아침에도 3번인가 심한 바람이 창문에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잠을 깼다. 급기야 이제는 물줄기까지 쏟아붓는다. 하늘은 짙은 구름이 빈틈없이 햇살을 막고 있었고 간간히 새들이 어지러이 날아다녔다. 환기를 한번 하고 싶었지만 창문을 열 엄두가 안 났다.
'토마토 사러 나가야 하는데.'
감자도 다 떨어졌고 올리브 오일도 사야 한다.
'그냥 메뉴를 바꿀까?'
창 밖 풍경이 너무 무시무시해서 도저히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집에 있는 재료들로 무엇을 만들 수 있을지 생각해 봤다. 그때 텅 빈 거리에 학교 가방을 멘 두 명의 어린 학생들이 몸을 웅크리고 꼭 붙어서 하교하는 모습이 보였다. 패딩 잠바의 모자를 꾹 눌러쓰고 있는 모습이 꼭 애벌레 같았다.
'저 작은 아이들도 다니는데.'
모자가 달린 두꺼운 잠바를 입고 목도리를 하고 장갑을 꼈다. 양말이 하필 발목양말 밖에 없다니. 어쩔 수 없었다. 감자를 사야 하니까 바퀴가 달린 장바구니를 끌고 가자.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지갑과 마스크를 챙겨 나왔다. 우편함에는 편지가 들어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가져오자. 바람이 가끔 한 번씩 숨도 못 쉴 정도로 심하게 불긴 했지만 고개를 돌려 잠시 멈춰 서면 그만이었다. 그 뒤에는 다시 잠잠해졌다. 꽁꽁 싸매고 온 덕에 춥지는 않았다. 가는 길에 하교하는 아이들을 몇 명 더 보았다. 지금이 하교할 시간이구나. 생각보다 다닐만하네. 나는 무사히 동네 채과점에 도착했다. 오늘따라 가게가 유독 아늑하게 느껴졌다. 단골 가게라 얼굴을 익힌 주인아저씨가 반갑게 인사했다. 나도 인사를 건넨 뒤 감자, 양파, 토마토, 당근, 병아리콩, 사과, 토마토소스 그리고 올리브 오일까지 필요한 것들로 장바구니를 채웠다.
집에 와서 빈 감자통을 채우고 채소들을 냉장고에 넣고 나니 왠지 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방 안에서 창 밖으로만 봤을 때는 엄두가 나지 않았던 일인데 막상 부딪혀 보니 별거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몇 달 전이었다면 이 날씨에도 자전거를 타고 출근을 했을 것이다. 사람 참 간사하구나. 창 밖으로 하수도 공사 중인 공터가 보였다. 그곳에서 일하시는 파란 작업복을 입은 아저씨는 겉옷도 없이 반팔 차림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날씨에 대단하시다.
'이제 토마토 스프 만들어 놓고 독일어 공부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