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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reinsteiger(2022.02.15.화요일)일상/일기 2022. 2. 16. 16:03
도미가 다시 주 5일 출근하는 삶을 시작했다. 극장에서 사운드 엔지니어로 일하게 됐다. 아주 어릴 때부터 취미활동으로 해 온 밴드 생활을 시작으로 예술학과 졸업 후 구직활동을 시작했을 때 이 취미활동이 발판이 되어 주었다. 사운드 관련 전공을 한 건 아니지만 밴드 때문에 독학으로 배워서 운 좋게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그곳에서의 연으로 다음 직업을 거쳐 여기까지 왔다. 이렇게 전공 분야가 아닌 일 혹은 비전공자가 취업하는 것을 독일어로 Quereinsteiger라고 한다. quer는 가로로, 비스듬하게 이런 뜻을 가지고 있고 der Einsteiger는 어디에 올라타는 사람, 승객 이런 뜻이어서 합치면 정식 루트가 아닌 옆 길로 올라 탄 사람을 뜻한다.
한국은 편의점 알바도 경력직을 구하는 사회인데 무경력 비전공자를 뽑다니 독일 사회는 역시 다른건가? 했지만 그건 아니고ㅎㅎ 사운드 관련 직종이 생긴 것이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 처음 이 일을 시작했던 사람들이 현역에 있는 경우가 많아서 그들은 실력만 있으면 된다는 마인드가 강한 분위기라고 한다. 그들도 다 독학으로 배워서 시작한 일이라. 사실 독일 전반적인 분위기는 전공으로 취업하는 것을 꽤 중요시 여기는 것 같다. 적어도 나와 같은 외국인 졸업자에게는 그렇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하려 했을 때, 전공을 살려서 취업하지 않으면 체류 비자를 받기 어렵다는 말이 있었다. 나는 한국인이니까 독일에 있는 한국 회사라던가 독일 사람들이 기피하는 직종에 한해서는 사장의 추천으로 비자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도미와 같은 예술학과를 졸업한 나는, 예술가는 커녕 정병을 얻으며 졸업한 나는 앞으로 살 길이 막막했다. 비자만 받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요양보호사 일을 시작했다.
요양보호사가 일이 힘들다는 말은 많이 들었다. 뉴스에서도 요양보호시스템 문제는 단골 테마였다. 하지만 그때는 비자만 받으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결혼은 싫었다. 도미도 결혼에 대해서 딱히 꼭 해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고 나는 결혼으로 비자를 받는 것을 비겁한 일로 여겼다. 어릴 때부터 엄마에게 독립적인 커리어 우면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자라 온 나다. 결론적으로 요양보호사 일은 좋은 경험으로 남았고 나는 결혼으로 체류 비자를 받았다. 한국에 가서 살 길은 독일에서의 결혼보다 더욱 막막했다. 이제야 왜 먼저 입학한 한국인 학생들이 독일에 남지 안/못하고 다 고국으로 떠나는지 알았다. 지금 독일에 남아서 사는 사람은 나처럼 독일인과 결혼했거나 일찌감치 예술학과로는 가망이 없다 여겨 중도에 그만두고 한국 회사에 취업한 사람뿐이다. 아 딱 한 명, 베를린에서 예술가로 사시는 분도 있기는 하다.
나는 그냥 이 정도 사람이구나. 자기혐오감에 시달렸다. 결혼 후에는 동네 마트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남는 시간에는 온갖 취미활동을 했다. 만화를 그리고 유리공예를 하고 수영을 배웠다. 그렇게 관심사를 옮겨 다니며 지금은 뜨개질과 게임 만들기까지 하고 있다. 나는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취미활동을 했다. 하지만 그 어떤 일도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수 없었다. 그저 졸업과 함께 시작한 비건 지향과 매년 텃밭을 가꾸는 것만은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이건 바뀌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졸업 후 한 결심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왜 살아야 하나 했던 마음이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마트 일도 자기 효능감을 채울 수 있어서 좋았다. 사회 어딘가에 나를 필요로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은 아주 중요했다. 운동을 싫어하는 내겐 몸을 움직여서 하는 일인 것도 좋았다. 이렇게 평생 살아도 좋을 것 같았다.
2022년 새해 시작과 함께 마트 일을 관뒀다. 이제 준비가 됐다. 내가 하고 싶은 일로 돈을 벌며 살 준비를 할 준비가. 홀가분한 마음으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취미활동 목록을 작성하고 나의 성향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그 중 시간을 투자해서 발전시키고 싶은 일들만 추렸다.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예술학과가 아닌 컴퓨터 공학 독일어로는 Informatik을 배우기로 했다.ㅋㅋㅋㅋㅋ 지금 독학으로 어영부영 게임을 만들면서 코딩이 의외로 나의 적성에 맞는다는 것을 알았다. 평생 한 번도 수학을 좋아해 본 일이 없는데 다시 시작한 수학 공부도 웬일인지 재밌었다. 뭣보다도 게임을 효율적으로 시간을 단축시키며 완성도 있게 만들고 싶었다. 3년이라는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져서 나도 도미처럼 독학으로 배워서 Quereinsteiger가 되어 볼까 했지만 도미는 어떻게 보면 아주 어릴 때부터 10년 넘는 시간을 독학한 셈이다. 내게는 전공하는 일이 제일 빠른 길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기왕 배우는 거 이론부터 차근차근 배워보고 싶은 마음도 컸다. 이제 무엇이든 어영부영 대충 하고 싶지 않다. (물론 독학으로도 제대로 배우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다시 학생이 되다니. 처음 독일에서 유햑생활을 시작했을 때 보다 10년은 늙었고 집중력도 없고 스트레스와 압박은 전혀 견딜 수 없는 몸이 되었는데. 내가 그 많은 시험을 해내고 무사히 졸업할 수 있을까? 차라리 전 전공과 관련 있는 일러스트레이터가 되는 길이 맞는 건 아닐까? 코딩 또한 단지 내가 입문자여서 당장 새롭고 즐거운 마음에 시작해 놓고 배울수록 어려워져서 흥미가 사라지면 놓아버리는 건 아닐까? 많은 고민이 들었지만 한 가지 동기가 강렬했다. 학업을 성공적으로 마치지 못해서 실패했다는 이 패배감에서 벗어나고 싶어. 무언가 한 가지 내가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을 만들고 싶어. 그리고 코딩은 안정적인 수입을 기대할 수 있다. 후원하고 싶은 곳에 맘껏 후원하고 싶다.
희망이 생겼다는 것 하나로 삶에 활력이 생겼다. 도미는 극장에서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조금 더 펼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나는 이번에는 잘은 아니더라도 실패하지는 않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그러니까 오늘도 잘 먹고 운동하고 공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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