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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건옵션식당(2022.02.26.토요일)일상/일기 2022. 2. 27. 18:40
어제 투표를 마치고 African Queen이라는 에리트리아 식당에서 점심 겸 저녁을 먹었다. 중앙역에서 걸어서 25분 정도 걸리는 위치에 있었고 찾는데 어렵지 않았지만 날씨가 너무 추워서 빨리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이곳은 프랑크푸르트에 오기 전날 밤에 급하게 찾은 레스토랑이다. 비건 레스토랑을 찾으니까 이스라엘 음식이나 햄버거 종류가 많이 보였는데 도미는 후무스, 팔라펠, 햄버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마땅한 곳이 없어 비건 옵션 식당을 찾았다. 여러 식당 중 한식당도 있었지만 비건 메뉴가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아프리카 식당이 눈에 띄었다. Kreuzkümmel 크로이츠퀴멜(큐민)이라는 향신료를 접하고 나서 비건 아프리카 요리를 꼭 경험해보고 싶어 하던 차였다. 뉘른베르크에는 한두 군데밖에 없었던 것 같은데 프랑크푸르트에는 꽤 많았다. 평점도 다 좋아서 어디를 갈까 검색해보다가 시간대와 위치를 보고 결정했다. 가리는 게 많은 도미도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건 좋은지 가자고 했다.
한산한 도로 위 높게 솟은 건물들 위로 겨우 한 마리 새가 보였다. 드디어 입구가 보였다. 사람이 들어간다. 저기가 우리가 갈 식당이야!
반가운 마음으로 문을 열자마자 흠칫 놀랐다. 표범이 내 앞에 있었다. 실물 크기의 조각상이었다. 깜짝이야. 주인이 우리를 적당한 자리로 안내했다. 배고팠던 우리는 많이 고민하지 않고 온라인으로 미리 봐둔 메뉴를 주문했다. Dju Dju라는 맥주와 삼부사, 그리고 4가지 소스를 한꺼번에 맛볼 수 있는 메뉴로 골랐다. 베지&비건 리스트가 따로 정리되어 있어서 주문하기 편했다. 하지만 베지와 비건이 같이 붙어있는 것을 보고 주인 분께 따로 한번 더 비건 여부를 확인했다. 웬일인지 도미도 비건 메뉴를 골랐다. 도미는 요즘 밖에서도 비건 메뉴를 자주 먹는다.
자리에 앉으니 몸이 녹으면서 긴장이 풀렸다. 주변을 둘러 보았다. 아직 저녁시간 전이라 그런지 손님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예약 테이블이 대부분이었다. 가게 안에는 원주민 그림들, 기린, 코끼리 같은 여러 조각상들로 빼곡했다. 골동품점이나 관광상품점에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앞에 앉은 도미를 보았다. 나는 당황했다. 도미가 팔을 걸치고 있는 의자 등받이에는 하얀 털 위에 까만 점박이 무늬가 있는 소가죽이 씌워져 있었다. 털이 쭈뼛 섰다.
"이거 설마 진짜일까?"
도미가 털을 이리저리 만져보고 단면을 보더니 살짝 굳은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진짜같은데?"
세상에... 그러고 보니 가게 내에 있는 의자들이 전부 이 소가죽으로 덮여 있었다. 내 눈이 커졌다. 도미는 내가 혹시나 나가자고 할까 봐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창 밖 풍경은 너무나 회색이고 나뭇가지들은 요란하게 박수를 쳐댔다. 그리고 이미 주문도 마쳤는걸... 예전에 갔던 태국 레스토랑에서의 악몽이 떠올랐다. 그곳도 현지인이 하는 작은 식당이었는데 분명 비건이라고 말했는데 닭알 범벅인 팟타이를 받고 집에 가는 길에 결국 울었던 기억이 있다. 비건 지향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식당 하나 가는 게 이렇게 힘들일이야? 앞에서 동물 사체를 와구와구 먹고 있는 도미를 보기도 역겨워서 토가 나올 것 같았던 그런 때...
주문한 요리가 나왔다. 얇은 빵 위에 샐러드 조금 그 옆으로 갖가지 소스가 가득했다. 주인 분이 약간은 귀찮은 듯 관광지 안내 가이드 같은 말투로 빵에 대해 잠깐 설명했다. 그리고 우리 음식은 손으로 먹어야 한다고 겁을 준 뒤 포크가 있다고 걱정하지 말라는 수만 번 반복했을 말도 빼먹지 않았다. 요리는 맛있었다. 독일인 입맛에 맞춘 맛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내 입맛에 맞을 정도의 평소 접하지 못한 향과 맛이 있었다. 특히 위에 뿌려 먹을 수 있는 4가지 각기 다른 매운맛의 향신료가 있었는데 집에 가면 꼭 구하리라 마음먹었다.
나오는 길 입구에는 예약 손님들이 가득했다. 장사가 잘 되는 듯했다.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이 식당에 다시 오고 싶지 않았다. 동물 가죽을 깔고 앉아서 비건 요리를 먹는 상황이 뭐랄까 페타의 잔인한 동물학대 영상을 틀어 놓고 밥을 먹는 것 같았다. 지금은 예전처럼 손이 덜덜 떨리고 눈물이 나고 그러지는 않는다. 그저 슬퍼진다. 분노가 섞인 슬픔. 마트에서 일하면서 단련? 된 걸지도. 반쯤 포기한 걸 지도.
뉘른으로 돌아와서 본 거리에는 익숙한 얼굴의 노숙자들이 구걸하고 있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자리에서 구걸하는 몸 어딘가 장애를 가진 사람들. 나는 어린아이를 납치해서 폭력을 가해 장애인으로 만든 뒤 구걸하도록 강요하는 조직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느 날은 도미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독일에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조직은 교묘하고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경찰들이 쉽게 손을 쓰지 못한다고도 했다. 지금 내 눈앞에 그 피해자일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마치 없는 것 마냥 그냥 지나치고 있는 상황이 너무 이상하고 슬펐다. 그리고 지금은 마트나 식당에 가서도 같은 감정을 느낀다. 빼곡하게 진열된 동물 살점과 소젖들. 차라리 식당 창 밖으로 보이던 그 회색빛 황량한 풍경 속에 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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