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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플라스틱이 정말 싫다일상/일기 2020. 10. 15. 05:00
내가 매일 플라스틱비닐오 포장하는 빵 특별한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 노동. 일을 "어느 정도"만 해낸다면 누가 맡아도 상관없는 노동.
나는 독일 대형 마트에 있는 빵집(Backshop)에서 일한다. 자주 가는 집 근처 마트에 장 보러 갔다가 구인공고를 보고 지원한 것이 2년 전 10월이었다. 이력서를 쓰면서도 정확히 무슨 일을 할지 몰랐다. 그냥 무엇이든 물건 진열하고 나르는 일이겠거니 했다. 당시 지점장과 면접을 보면서 처음 마트에 속한 빵집에서 일할 사람을 구한다는 말을 들었고, 나는 빵을 굽기는 커녕 잘 먹지도 않는데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오븐도 제대로 쓸 줄 몰랐다. 그런데 지점장은 그런건 전혀 문제없다며 일은 금방 배울 수 있을거라고 했고, 그 말은 사실이었다. 한 두번 빵 300개 정도를 태워먹긴 했지만 일 자체는 배우기 어렵지 않았다. 다행히 (동료 피셜) 호시절에 들어와서 일하는 분위기도, 같이 일하는 동료들도 좋았다. 집에서 자전거로 10분 거리인 점이 좋았고, 무엇보다 별 긴장감 없이 해낼 수 있는 일이어서 좋았다. 스트레스에 약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2년 동안 꽤 많은 일을 경험하고 배웠다. 특히 사회생활을 거의 경험하지 못한 나에게는 공적인 자리에서 사람을 만나고 함께 일하고 이야기 나누는게 좋았다. 때론 피곤하고 남의 험담을 듣는 때도 많고 갈등도 있었지만(독일 사람들 진짜 뒷담화 엄청 많이 한다.) 그래도 꽤 긴 시간 혼자 지냈던 터라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건 대부분 즐거웠다.
빵을 굽는 일도 좋았다. 손님들이 묻는 질문에 답하는 일도, 빵을 잘라 포장하는 일도, 원하는 제품을 찾아주는 일도 적성에 맞았다. 상자를 나르고 냉동창고에서 일하는 등 힘을 쓰는 일도 꺼려지지 않았다. 제법 할만 했다. 별다른 생각없이 할 수 있는 일이라 재밌는 공상도 많이 했다. 혼자 혹은 둘이 일하는 것도 좋았다.
반대로 힘들었던 건 플라스틱비닐을 사용하는 일, 매일 저녁 가득 찬 커다란 비닐쓰레기봉투를 보는 것이 힘들었다. 전에 한 번 보았던 죽은 새의 뱃 속에 들어 있던 플라스틱쓰레기가 떠올랐다. 쥐덫을 보는 일도 힘들었다. 처음 검은 상자가 쥐덫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런데 플라스틱비닐도 쥐덫도 어느덧 익숙해져서 무덤덤해진 나를 깨닺고는 슬퍼지기도 했다. 진열대 가득 쌓인 제품들을 볼 때면 질려하기도 했다. 특히 악덕기업으로 유명한 상표를 달고 있는 제품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걸 볼 때면 그런 기업과 일하는 내 일터에도 질려버렸다. 오븐이 내는 소음, 창문 하나 없는 공간의 건조한 공기가 가끔 참을 수 없었고, 동료들과 원활하게 협동이 안될 때도 힘들었지만 이런건 잠깐이었다. 하지만 플라스틱 사용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었고, 당장 변할 것 같지도 않다.
어쨌든 시간은 흘러 벌써 2년이 다 됐고, 오늘 지점장이 정규직전환 계약서에 싸인을 하라고 불렀다.(독일은 일정규모 이상의 사업장이면 2년 후에도 노동자를 쓰기를 원할 경우 무조건 정규직으로 써야 한다) 그런데 계약서에는 지난 계약서의 내용을 유지, 연장한다고 되어 있었다. 나는 거의 최저임금에 가까운 임금을 받고 있었고, 이 임금으로 평생노동을 시작할 수는 없었다. 나는 임금 인상을 요구했고, 지점장은 일단 연장하고, 자기가 계산해보고 가능할지 알려준다고 했다. 나는 어느 정도 인상을 원하는지 이야기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얼마나 좋은 노동자인지, 능력이 있는지는 여기에서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값이 싸면 "그런대로 쓸만한" 정도면 되는 것이다. 나는 싸인하기 전에 어필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대충 싸인하고 김이 빠져서 나왔다.
다시 일터로 와서 4등분 한 빵을 플라스틱비닐봉투에 담아 가격표를 붙이면서, 내가 이 플라스틱비닐봉투라는 생각을 했다. 어디에나 있고, 균일한 품질에 낮게 책정된 가격. 환경에 해롭다는 부분까지.
나는 플라스틱이 정말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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