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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물용 핸드그라인더.... 한마디로 맷돌!일상/일기 2021. 4. 6. 01:53
참지 못하고 질러버렸다.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 보다 많은 이유를 찾기 위해 애썼지만 사실 단 한가지 이유였다. 콩가루와 찹쌀가루. 나는 곡물용 핸드그라인더를 샀다.
그라인더가 있으면 플라스틱 포장 없는 날콩가루를 얻을 수 있어. 독일어로는 die Handmühle für Getreide 라고 한다. 서양식 맷돌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다른 점은 손잡이와 돌 이외에 나무로 만든 지지대가 있다는 점 정도? 우연히 날콩가루로 두부를 만들면 콩을 하룻밤 불릴 필요없이 한결 손쉬운 두부 제조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플라스틱 포장재 때문에 두부와 콩가루를 소비하지 않고 있던 내게 이 서양식 맷돌은 너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비오마트에는 전동곡물분쇄기가 있다. 하지만 제빵에 쓰이는 곡물 Weizen, Roggen, Dinkel 이외의 콩 종류나 쌀 종류는 대부분 플라스틱으로 포장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제로웨이스트샵 안에 아님 옆에 방앗간이 같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성능 좋은 커다란 믹서기나 착즙기를 두고 살짝 고민했지만 결국은 분쇄기였다. 이유는 집에 이미 핸드믹서기가 있고 착즙기는 콩물 만들기 말고는 잘 쓰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무엇보다도 되도록이면 더이상 전자제품을 집에 들이고 싶지 않았다. 나무, 스테인리스, 돌로 만들어진 사진 속 핸드그라인더가 반짝반짝 빛났다. 모터 달린 분쇄기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나의 이상과 잘 맞는 제품이라도 실제로 일상적으로 쓰기에 무리가 있다면 예쁜 쓰레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리뷰 영상과 모델별 성능을 꼼꼼하게 비교해 본 결과 www.muehlen-kaiser.de/handmuehlen/kornkraft/515/handmuehle-mia-mola-ohne-glas-kornkraft 이 제품이 내게 딱 좋아보였다. 리뷰 중 "300g까지는 한 번에 무리없이 갈아요." 라는 문장이 마음에 들었다. 그 정도면 두부 한 모를 만들 수 있으니까.
독일에서는 주로 취미로 베이킹하는 사람들이 시중에서 구하기 힘든 다양한 곡물 혹은 갓 빻은 신선한 밀가루로 빵을 만들기 위해서 구매하는 것 같았다. 나도 빵을 만들기는 하지만 내 제일 첫번째 목표는 보다 쉽게 두부를 만드는 것, 두번째 목표는 찹쌀가루를 만들어 절편같은 떡을 만드는 것이었고, 더 알아본 결과 백태(Sojabohnen)는 확실히 사용 가능했고, 쌀을 두고는 공식 설명서에는 없고 사용자들 말이 갈렸는데 나중에 집에서 찹쌀(Klebreis)를 갈아본 결과 아무 문제없이 잘 갈렸다. 기름진 견과류나 옥수수콘은 쓰지 말라고 한다.
내가 구입한 그라인더는 책상 가장자리에 고정시켜서 사용하도록 되어 있고, 입자굵기는 20단계로 조절이 가능하다. 백태같이 큰 곡물은 아주 고운 단계를 1로 치면 7-10단계 정도에서 잘 갈렸다. 1단계에서는 헛돌았다. 밀이나 쌀같이 크기가 작은 곡물은 1단계로도 아주 잘 갈렸다. 확실히 시판 가루보다는 거칠지만 한 번은 밀을 갈아서 피자도우를 만들었는데 전혀 이물감이 느껴지거나 하지 않았다.
내가 편안한 속도로 백태 150g을 가는데 30분이 걸렸다. 전동분쇄기를 생각하면 답답한 속도지만 나는 이 시간을 명상 혹은 운동의 시간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콩을 넣고 팔에 적당한 힘을 써서 손잡이를 돌리고 있자면 어느 순간 아무 잡념없이 멍 때리게 된다. 마치 서예시간에 먹 갈던 때와 비슷하다. 먹가는 소리보다는 크지만 콩 갈리는 소리도 듣기 좋다. 내 팔근육이 고무밴드요, 내 에너지가 모터라고 생각하며, 나는 기계다, 천연 자원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 콩이 다 갈려 있을 즈음엔 그냥 무념무상이 된다. 팔근육이 살짝 저릿하다.
아주 옛날에는 제분이 상당히 고된 노동이었고 노예들이 그 일을 했다고 한다. 하루 8시간 이상 밀만 간다면 나라도 죽을 것 같다. 물레방아가 만들어지고, 산업혁명이 일어난 후 인간은 그런 류의 노동에서는 해방되었지만, 현재는 더 빠르게, 더 편리하게, 더 풍족하게 소비할 것을 충동질하는 자본주의사회의 발전과 함께 기후 위기와 플라스틱쓰레기 문제에 직면해 있다. 문득 돌아가는 손잡이가 시계바늘처럼도 보인다. 나는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가는 것일까, 반대로 미래로 가는 것일까. 내 서양식 맷돌을 본 파트너는 이것은 빈티지판타지라는 둥, 과거로의 회귀라는 둥 신나게 나를 놀려댔지만 오는 주말에는 손수 밀을 갈아서 자기만의 피자를 만들겠다고 큰소리쳤다. 그리고 만든 피자를 먹으며 연신 grandios!를 외쳤다.
빵을 주식으로 하는 나라에서 현대의 어느 누구도 모든 곡물을 맷돌로 갈아서 요리해 먹으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부터도 곤란하게 느껴진다. 다들 저마다의 일들로 바쁘고 지쳐 있고, 마트에 가면 질 좋은 밀가루도 충분히 많고 손쉽게 살 수 있는데 굳이 힘과 시간을 들여서 가루를 만드는 모습이 사치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노동과 과소비의 굴레에서 벗어나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다른 세상을 꿈꾸고 조금이나마 경험해보는 일은 소중하다. 적어도 각자 원하는 대안적 삶을 꿈꾸고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거나 시도해볼 수 있는 삶을 위한 안전망이 구축된 사회가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