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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매드랜드와 나
    일상/일기 2021. 6. 5. 02:12

     

    노매드랜드를 봤다. 아무 사전 지식 없이 감독이 아시안 여성이라서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제목도 마음에 들었다. 

     

    주인공 펀이 함께 노매드하는 친구와 아마존 회사에서 일하는 모습까지 보면서는 미국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영화인가 보다 했다. 물론 이것도 맞긴 한데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났을 때는 노매드라는 단어가 갖는 여러 의미의 층위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노매드를 해본 적도 없고, 여행도 그닥 자주 하지 않고 오히려 집 안에서 머무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임에도 집, 혼자, 길, 만남과 헤어짐 등과 같이 노매드와 연결되는 단어들이 완전 나와 동떨어진 느낌이 아니었다. 왜일까? 노매드랜드 속 집은 안정적일 순 있지만 내가 평생을 죽어라 일해도 가질 수 없는 공간이고, 내가 속한 곳은 아닌 공간이고, 떠나온 고향이고, 묶인 기억이다. 펀에게는 소중한 사람을 잃은 기억의 장소다. 펀은 죽은 남편과의 추억이 있는 집과 물건들을 처분하고 다시 벤을 타고 떠난다. 그리고 영화는 괜찮다고, 또 보자고 말한다. 펀의 벤과 벤이 달리는 길, 펀의 여동생과 새로운 인연이 살고 있는 집과 땅. 혼자인 펀과 가족과 함께인 그들이 서로를 마주 본다. 

     

    한국을 떠나 독일에서 벌써 10년 째 살고 있으면서도 나는 내가 아직도 떠다니는 씨앗 같다고 느낀다. 가끔은 내가 산 채로 진공 포장되어 있는 것 같다. 학교를 졸업하고 파트너를 만나 일을 하며 살고 있지만 독일 사회에도, 독일 내 한인사회에도, 한국사회에도 속하지 못한 채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 아주 작고 고립된 세계지만 분명 나와 연결된 세계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기분일까? 영화를 본 뒤 나에게는 '집'이 잃어버린 꿈과 실패한 기억의 장소라는 것을 깨달았다. 기회의 땅이었던 독일이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는 공간이 된 것이다. 파트너가 아니라면 내가 독일에 있을 이유가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한국에 갈 이유는? 독일도 한국도 아니라면 대체 어디로?

     

    펀에게도 남편 뿐 아니라 다른 가족인 여동생이 있다. 여동생이 있는 집은 가족을 향한 부채감, 미안함이 있는 장소다. 나에게는 그곳이 엄마가 있는 한국이다. 나와 엄마의 관계는 푄과 여동생의 관계보다 훨씬 끈적해서 그 둘이 침대에 나란히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나는 울고 또 울었다. 그리고 푄이 떠나는 장면에서 안도했다. 푄은 남편 아닌 가족과도, 새로운 인연과도, 노매드 친구가 죽고 혼자 남은 강아지와도 함께 할 수 없다. 나는 그런 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 그들의 역사와 물건, 음식을 공유하고 만나서 즐겁게 놀고 헤어지는, 그리고 우연히 다시 만나는 모습은 잔뜩 움츠러든 내 모습을 돌아보게 했다. 펀이 자기의 집인 소형 벤을 타고 길을 가는 장면에서 자기가 원하는 집과 함께라면 어디로 가든, 무엇을 하든 목적지가 없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의 광활한 대자연을 보는 일도 지금 현재 나에게 주어진 것, 소중한 것들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미국에 가보고 싶단 생각은 한 번도 한 적 없는데 이 영화를 보고 한 번쯤 갈 기회가 생긴다면 가보고 싶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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