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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가을/겨울 텃밭 계획발코니 텃밭 일지/2021년 2021. 8. 16. 01:31
여름은 아직 온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7월이 지나 8월 하고도 중순이다.
꽤 길었던 파업이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출퇴근만 하며 지내서 안 그래도 일상이 단조로운데 벌써 해까지 짧아지는 것 같아서 이번 여름은 이대로 오지도 않고 가는 걸까 아쉬울 참에 마침 어제, 오늘 해가 쨍하고 나서 햇볕을 마음껏 쬐었다.
내 발코니 작물들도 햇볕을 쬐었다. 내 방에는 먹을 만한 고추가 식물 하나당 대여섯씩 달렸고, 레몬그라스와 타임도 잘 자라고 있다. 작년에 받아두었던 라벤더 씨앗을 심었던게 싹을 내었고 그 옆에는 기다리지 못하고 저번에 바우하우스에 가서 사 온 라벤더가 하나 둘 꽃을 피우고 있다. 고추 모종이겠거니 하고 키운 정체를 알 수 없는 식물도 꽤 커져서 피살리스와 비슷하게 생긴 열매를 맺었다. (피살리스는 주머니 모양의 껍질 속에 동그란 알맹이가 들어있는 모양이다*) 혹시 피살리스의 다른 한 종류일까 싶어 사진을 찾아 잎모양을 열심히 비교해보았지만 확실히 피살리스는 아니고 먹을 수 있는지 여부도 알 수 없다. 먹을 수 없어도 뿌리파리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잘 자라는 모습이 대단해서 그냥 두고 있다.
어쨌든 작년 가을, 겨울에는 작물을 새로 심지 않고 그대로 두었지만 올 해는 심을 수 있는 적당한 작물이 있으면 한 번 도전해 보기로 했다. 찾아보니 예상 외로 해볼 만한 것들이 꽤 있었다. 그런데 지금 텃밭은 이미 자리가 다 차서 일단 깻잎이 너무 많으니 가을 작물들을 위해 호흐베트 하나만 남기고 다 뽑았다. 깻잎은 모아서 냉장고에 보관하여 먹었고 줄기는 잘게 잘라 콤포스트로 만들기 위해 모아두었다. 깻잎 뿌리가 얼마나 깊이 박혀있던지 뽑는데 애 좀 먹었다. 그리고 뽑는 과정에서 거미, 귀뚜라미, 나방 애벌레, 진딧물, 무당벌레, 지네 등 많은 소동물들을 만났다. (점잖게 표현했지만 사실 놀라 자빠지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ㅋㅋ)
초기 스케치. 포레(대파와 비슷하게 생김*)를 하고 싶었는데 그럼 5월에 벌써 모종을 만들기 시작해야 한다고 해서 내년으로 미뤘다. 2021년 가을/겨울 텃밭계획표
작물 파종 수확 장소, 특이 사항 가을 당근 8월 10월 큰 발콘 마늘 10월 내년 6월 큰 발콘, 깻잎 수확한 자리 래디쉬 - 10월 큰 발콘 쑥갓 9월-10월 11월 화분 혹은 부엌 발콘 파슬리 8월 내년 초 화분 가을무 8월 12월 내 방 발콘 이번 가을, 겨울 텃밭 계획표를 표로 정리해 보면 위의 표와 같다.
8월에 파종한 당근, 래디쉬, 가을무에서는 다 싹이 나서 솎아주기까지 끝냈는데 파슬리만 아직 소식이 없다. 원래 싹 틔우기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하는데 벌써 2주가 지나서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다. 싹이 안 나면 그 자리에는 쑥갓을 심을 생각이다. 그리고 당근 새싹 반 정도가 어제오늘 사이 강한 햇볕을 견디지 못하고 말라죽었다. 아침저녁으로 물을 줬지만 역부족이었다. 한국에서 엄마가 보내준 씨앗인데, 춘하당근이라고 쓰여있는 걸 무시하고 심은 것이 문제인지, 새싹이니까 약간 그늘진 곳에 심었어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반 정도는 아직 괜찮으니까 두고 보려고 한다. 쑥갓은 올해 초부터 시도했는데 이상하게 실패했고, 마늘은 이번이 첫 도전이라서 설렌다. 가을, 겨울에도 심을 수 있는 작물이 생각보다 많아서 조금 놀랍고 기쁘지만, 내게 있어 이번 가을, 겨울에 가장 열심히 해야 할 일은 콤포스트를 만드는 일이다. 양질의 흙을 미리 준비해둬야 내년 봄에 시기를 놓치지 않고 식물들을 심을 수 있다. 내년에는 애호박, 방울토마토, 피살리스도 키워보고 싶기 때문에 흙과 화분을 충분히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통에 음식물 쓰레기와 마른 잎 등을 열심히 모으는 중이다. 콤포스트 만들기에는 이제 자신감이 생겼다.ㅎㅎ
그리고 화분은 사실 호흐베트를 2개 더 만들려고 했는데, 바우하우스에 가보니 목재 가격이 2배 이상 올라 있어서 만드는 게 사는 것보다 비싸고, 사려고 보니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 없어서 사지 못했다. 플라스틱은 싫고, 토분은 큰 걸 사기는 부담스러워서 고민하던 차에 대야처럼 생긴 철제 통이 보여서 시험 삼아 하나만 샀다. 드릴로 바닥에 구멍을 몇 개 뚫으면 화분으로 충분히 제기능을 할 것 같다.
여러 모로 싱숭생숭한 마음이다. 뉴스에서 보는 기후위기로 인한 재난을 보면 지금 내 머리 위의 파란 하늘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공정치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도둑이라도 된 기분.... 여기에 전혀 변할 것 같지 않은 사회를 보면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뭔가가 푹 꺼져 내려가는 것 같다. 자꾸만 사라지는 신뢰와 이 실망감을 풀기 위해 집중할 무언가를 계속 찾고 있다. 아니면 텃밭에서 작년처럼 잘 자라는 식물들을 보며 그래도 아직은 괜찮은가 싶은 헛된 안도감만 찾으려 한다. 오늘 하루 이 불안한 시기를 살아내려고 노력하는 이들에게 평온한 저녁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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