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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 공사와 배달피자(2022.02.04.금요일)일상/일기 2022. 2. 5. 16:08
오비이(한국의 철물점과 비슷하지만 규모가 큰 체인점)에서 연락이 왔다. 저번에 맡겨 놓은 부엌 작업대에 싱크대를 놓을 구멍을 뚫어놨으니 가져가라는 문자였다.(엄마랑 통화했어어편 참고: https://selbstversorger.tistory.com/67) 싱크대가 쓸데없이 커서 작업할 공간이 턱없이 부족했는데 오븐 위치를 옮기려면 작업대 길이를 변경해야 해서 이 참에 싱크대까지 바꾸는 것이다. 약속대로라면 월요일이나 화요일에 진작 받았어야 하지만 이번 주 안으로 온 게 어디냐. 목요일에 한번 전화를 했던 게 다행이었다. 왜냐면 목요일 저녁에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까먹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럴 수도 있지. 신난다!
아침에 일어나서 블로그 일기를 쓰고 있는데 웬일로 도미가 눈을 비비며 내 방으로 왔다. 10시 15분 전이었다. 매일 그가 맞춰 놓은 10시 알람을 11시까지 들어야 했는데. 나는 놀릴 수 있을 때까지 놀렸다. 이사 들어올 때는 리햐르트(도미의 아빠)의 주도 하에 부엌 장을 만들고 수도관과 배수관을 무사히 설치할 수 있었지만 오늘은 도미랑 나, 우리 둘이서 해내야 한다.* (*독일에는 이사 갈 집 부엌이 비어있는 경우가 많다. 이사 들어올 때 설치하고 나갈 때 다시 가져가거나 다음 세입자에게 값을 받고 넘기거나 한다.) 제발 배수관까지 뜯어고쳐야 하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우리는 서둘러 나갈 채비를 마치고 작업대를 옮길 작은 바퀴 달린 수레를 손에 들고 나왔다. 버스를 타야 했다.
도미는 나의 눈흘김을 받으며 오비이 앞에 있는 임비스*에서 소세지를 끼운 빵을 사 먹었다. (*한국의 포장마차와 비슷한 노점) 터키 케밥, 아시아 누들, 독일 소세지, 독일 생선 가게가 나란히 있었다. 생선가게는 장사가 잘 되지 않는지 소세지 가게의 메뉴를 넘보기 시작했다. 새 메뉴판의 글자가 온통 초록색이었지만 어디에도 유기농이라거나 비건이라는 단어는 보이지 않았다. 이럴 줄 알고 집에서 먹고 왔지. 괜찮은 비건 메뉴가 하나쯤 있을 법도 한데. 오비이에 오는 사람들 성향을 알 수 있었다. 두부집을 차리기에 좋은 장소는 아니군.
작업대를 받긴 받았는데 네모난 선만 있을 뿐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자르긴 했는데 모서리 부분만 남긴 것이다. 직접 톱질을 해야 했다. 아니 20유로 받았으면서. 저번에는 리햐르트가 전동톱을 가져와서 무려 모서리 둥글게 네모난 구멍도 뚫었는데 둘이서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뭐 하나도 기대했던 대로 나오는 경우가 없네. 우리집에는 작은 줄톱 밖에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마음에 들지 않는 브랜드의 일본식 톱을 샀다. 도미는 집까지 오는 내내 던던댄스를 불렀다. 고음 부분을 우스꽝스럽게 불러서 이미 지적을 받았지만 소용없었다.
우리는 오늘 한 팀이다. 도미는 리햐르트의 자식답게 뭐든 잘 만든다. 이미 한번 봤으니 문제 없어. 나도 나무를 다루는 일이라면 나름 자신 있다. 나는 호흐베트도 혼자 만들었다고. 할. 수. 있. 다. 우리는 작업 순서를 정하고 빠르게 일을 진행했다.
8시에 시작한 하루는 저녁 8시가 되어도 끝나지 않았다. 아침을 든든하게 먹은게 천만다행이었다. 수도를 잠가서 있는 물이라곤 화장실 세면대에 받아 놓은 이미 손을 두어 번 씻은 더러운 물이 다였다. 이것이 지구 생물의 미래인가. 작업은 순조로운 편이었지만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지. 실리콘으로 마무리하고 배수관을 연결하면 끝인데 나는 이미 방전된 상태였다. 물 때문에 내일로 미룰 수도 없다. 도미도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었다. 일이 빨리 끝나면 맥주를 사 와서 오븐에 감자를 구워 함께 먹으려 했건만 마트는 이미 문을 닫았다. 오븐 감자고 뭐고 그냥 샤워하고 자고 싶다.
저녁 아홉시. 우여곡절 끝에 실리콘 작업까지 끝내고 이제 배수관만 연결하면 된다.
"도미, 피자 배달시키자."
우리에게는 아주 드문 일이다. 일 년에 한 번도 시키지 않은 일을 세는 것보다 배달시켰던 때를 기억하기가 쉽다. 우리는 배달 서비스를 별로 마땅찮아했다. 언제부턴가 독일에 길에서 네모난 박스 모양의 가방을 메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비스업체의 갑질과 횡포에 대한 기사가 나왔다. 움직이는 게 불편하지 않으면 굳이... 플라스틱 걱정 없이 주문할 수 있는 배달음식 찾기도 힘들어. 웬일로 둘의 생각이 일치했다.
"그래. 맥주도 시키자."
이번에도 둘의 생각이 일치했다. 피자와 맥주는 언제나 진리. 시간이 없다. 나는 빠르게 집 주변 피자가게를 검색했다. 아홉시 이후에도 일을 하고 그것을 배달까지 하는 가게를 찾는 게 쉽지 않았다. 열 시까지 하는 곳 있다! 양송이 피자 하나랑 베지 피자에 치즈 빼고 하나 주세요. 맥주도 있나요? 아쉽게 맥주는 없었다. 카드 결제되나요? 현금만 가능했다. 나는 지갑에 꽂혀 있던 지폐 한 장을 기억해냈다. 현금 괜찮아요. 주세요.
"진아, 이제 수도 꼭지 틀어봐."
쏴아아아아아아- 찬물, 뜨거운 물 다 잘 나왔고 물이 새서 바닥에 흐르지도 않았다.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환호했다. 샤워할 수 있다! 냉장고 구석에 있던 필스너 맥주 한 병도 발견했다. 긴 하루였다. 이제 30분 뒤면 피자가 온다. 나는 지갑을 챙겨 왔다. 그런데 왜 20유로짜리 지폐가 아닌 거지? 지갑에는 10유로짜리 지폐 한 장과 동전이 4유로 정도 있었다. 도미는 마침 현금이 하나도 없었다. 피자 값만 17유론데... 팁까지 하면 20유로를 줘야 하는데 어떡해! 도미가 쏜살같이 외투를 입었다. 은행 다녀올게! 내 실순데 내가 갈게! 아냐, 내가 빨라. 배달 왔는데 내가 도착 전이면 네가 좀 잡고 있어.
나는 빠르게 먹을 자리를 치우고 부엌 뒷정리를 했다. 얼마 뒤 초인종이 울림과 동시에 핸드폰이 같이 울렸다. 도미 아직 안왔는데... 나는 전화를 받으며 건물 현관으로 내려갔다. 잔화는 배달하시는 분이 한 것이었다. 저 내려가요! 아, 마스크! 출입문을 열었고 배달하시는 분의 얼굴 뒤로 어둠 속에서 막 도착한 도미가 보였다! 신이시여!
피자는 따뜻했고 필스너는 시원했다. 나는 뉴트리셔널이스트와 칠리 오일을 뿌려서 먹었다. 우리 집 근처에 이런 피자집이 있었나? 우리는 피자를 입에 물고 연신 하이파이브를 해가며 서로를 추켜 세웠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도미가 리햐르트와 엘디에게 오늘의 무용담을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말이 많은 집이구만. 나는 잠이 막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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