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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기와 손빨래(2023.02.01.수요일)일상/일기 2023. 2. 2. 08:06
보자... 저번 주 토요일이니까 4일. 4일째 건조대에 걸려 있는 빨래들이 여전히 축축하다. 세탁기는 고장이 나도 하필 겨울에 난담? 벌써 10일도 전이다. 평소처럼 빨래통 한가득 쌓인 양말을 세탁기에 넣어 돌렸다. 시간이 지나 세탁을 끝낸 빨래를 가져가려는데 웬걸? 빨래가 흥건하게 물에 젖어 있다. 이상하네 싶어 물기 제거 과정만 한 번 더 돌리려고 보니 부엌 전기가 나가 있었다. 뭐지? 두꺼비집을 열어 내려간 레버를 올리고 세탁기를 보니 F4 표시가 떠 있다. 헐. 바로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속도조절장치에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장치에 전기를 보내는 석탄막대가 두 개 있는데 그것을 교체하면 99퍼센트의 확률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나와 있었다. 퇴근한 도미에게 상황을 알리고 다음 날 바로 필요한 부품을 온라인으로 주문했다. 주말이 껴서 적어도 3일은 걸리지만 일주일 안에만 세탁기를 고칠 수 있다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독일 전국 노조 연합인 베르디에서 이번에는 택배 파업 시위를 한다는 뉴스를 보았다.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시위였는데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루 이틀 정도 늦어지는 건 뭐, 하는 수 없지 마음 느긋하게 먹고 있는데 생각했던 날 택배를 받았다. 이제 고칠 수 있겠다! 퇴근하자마자 저녁도 먹기 전에 세탁기부터 고치려는 도미를 말리고 저녁부터 먹었다. 수리가 언제 끝날 줄 알고. 내가 맞았다. 도미는 그날부터 3일 간 세탁기와 씨름을 했다. 첫 날에는 석탄 막대가 새 거라 장치에 닿는 면적이 적어서 사포로 각을 맞춰 갈았지만 소용없었고, 둘째 날은 뭔가 불안하지만 돌아가기는 하던 드럼통이 빨리 돌아가려고만 하면 전기가 나가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도미 아빠가 원격으로 진단과 해결법을 주었지만 소용없었다. 3일째 되는 날 나는 실패만 거듭하는 미친 과학자의 얼굴을 한 도미를 봤고 이제 그만하자고 다독였다. 이 세탁기는 도미가 처음 대학에 가면서 자취를 시작했을 때 300유로 정도 하는 싼 브랜드의 세탁기인데 지금까지 10년을 넘는 시간 동안 한 번도 문제를 일으킨 적 없이 잘 돌아갔었다. 고장 원인을 모르니까 포기가 되지 않는 도미였다. 그때 리햐르트(도미 아빠 aka. 취미 수리기사?)가 전화해서 세탁기를 보러 오겠다고 했다.ㅋㅋㅋㅋㅋㅋㅋㅋ 리햐르트가 보고 고칠 수 없다고 판단하면 그날 바로 세탁기를 사러 가기로 했다. 리햐르트가 오는 김에 어시스트로 필립도 오고, 그러니까 엘디도 나를 보러 오겠다 해서 결국 고장 난 세탁기 덕분에 오랜만에 가족들 얼굴을 다 보게 되었다. 하지만 또 주말이 껴서 오는 월요일까지 이틀을 기다려야 했고 이때 우리 집 빨래통 두 개는 다 완전히 포화상태였다. 그 사이 속옷과 양말은 한 번 손빨래를 했는데도 그간 쌓인 옷과 수건 양이 어마어마했다. 집 근처 코인세탁소를 알아봤지만 가장 가까운 곳이 버스와 트램을 타고 30분은 넘게 가야 하는 곳에 있었다.
우리는 욕조에 물을 받고 세제를 푼 뒤 당장 필요한 것들을 넣었다. 추린다고 했는데도 양이 꽤 많았다. 나는 바지를 걷고 욕조에 들어가 발로 빨래를 밟았다. 도미가 손을 잡아 넘어지지 않게 도와주었다. 이때까지는 그래도 할만했다. 심지어 재미도 있었다. 하지만 진짜는 세척해서 빨래를 짤 때였다. 욕조 양쪽에 앉아서 둘이서 빨래 끝을 한 쪽씩 잡고 다른 방향으로 돌려 비틀어 짜는데 이 과정이 힘들어도 너무 힘들었다. 물을 잔뜩 먹은 스웨터는 정말 무거웠다. 나와 동생이 아기였을 때 셋방 살이를 하던 엄마가 집에 세탁기가 없는데 우리 일회용 기저귀를 살 형편이 안 돼서 천기저귀를 썼단 말을 했던 것이 기억났다. 엄마 키보다 큰 기저귀 천을 빨려면 섰다 앉았다를 반복해야 했다. 그 천을 다시 삶고 널고... 하루는 너무 힘들어서 울면서 빨래를 했다고 했다.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일은 엄마한테 안부 전화를 해야지. 도미랑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빨래를 짰다. 그러다 도미는 출근 시간이 되어 나가고 나는 빨래들을 널었다. 추워도 발코니에 널었어야 했는데 그래도 실내가 따뜻하니 빨리 마르겠지 싶어 방 안에 널었더니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빨래에서 물기가 뚝뚝 떨어져서 그새 바닥이 흥건하게 젖었다. 하... 급하게 있던 수건 빨래들을 바닥에 깔았다. 그러고 보니 방 안이 온통 난장판이다. 아, 심란해. 그렇게 심란한 마음으로 주말을 보내고 다음날 도미네 가족이 왔다.
엘디는 올 때마다 꼭 비건 Zopf(식빵인데 꽈배기 모양으로 생겼다)를 가득 만들어서 가져 온다. 나는 간단하게 렌틸콩 스파게티와 샐러드를 점심으로 만들어 같이 먹었다. 다들 맛있다고 해줘서 좋았다. 그렇게 커피타임까지 갖고 난 후 리햐르트가 가져온 공구 상자를 꺼냈다. 필립이 어시스트로 일을 도왔는데 딱히 둘이 합이 잘 맞는 팀은 아니었다.ㅋㅋㅋㅋ 그러는 동안 나와 엘디는 못 나눈 수다를 떨었다. 엘디가 옛날에는 빨래가 힘들어 어린이들이 학교 갈 때 옷 위에 앞치마 같은 보호복을 하나 더 입었다고 알려 줬다. 나는 빨강머리 앤에서 앤이 입은 옷을 생각했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 지났나? 리햐르트가 오더니 아무래도 새 세탁기를 사야겠다고 다소 아쉬워하는 말투로 말했다. 오히려 나와 도미는 와서 봐 준 덕분에 고장 원인도 알았고 미련 없이 새 세탁기를 살 수 있어서 기쁘다고 말했다.(모터가 고장 난 거라 어쩔 수 없었다.) 고장 난 세탁기는 Wertstoffhof에 보내면 그곳에서 알아서 분해해서 처리해 줄 것이다. 저녁은 되어야 퇴근한다던 도미가 한 3시간은 일찍 집에 왔다. 세탁기 때문에 일을 빨리 끝내고 왔다고 했다.ㅋㅋㅋㅋㅋㅋ 진짜 세탁기 하나 때문에 이럴 일이냐고. 어쨌든 우리는 봐두었던 세탁기를 무사히 사서 그날 설치까지 완료했다. 일이 차질 없이 진행되어서 다행이었다. 저녁은 단골 피자집에서 피자를 배달시켜 먹고 과일 슈납스(독한 술)로 소화를 시켰다. 그렇게 도미네 가족은 당일 날 바로 집으로 갔다.
최근에 환경 친화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짧은 다큐를 본 적이 있다. 최소한의 에너지로 살면서 부족한 에너지는 직접 만들어 쓰기도 했다. 그 영상을 볼 때만 해도 나도 언젠가 기회가 온다면 저런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고작 2주 빨래를 못하면서 받은 스트레스를 생각하니 다큐 속 사람들의 삶이 훨씬 대단해 보였다. 과연 내가 그 많은 불편함들을 견디며 살 수 있는 인간일까? 자신이 없어졌다. 지금 살고 있는 집에 들어 올 때 집 구조 상 냉장고와 식기 세척기 중 하나만 선택해야 했던 것을 아쉬워했었던 나인데.
요즘 세상엔 최적의 편리함을 위한 전기제품들이 무수히 많다. 솔직히 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적정선이 있다면 그건 누가 어떻게 정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어쨌든 이번 경험을 통해 세탁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 원리도 알 수 있었고, 세탁기가 나의 삶에 주는 편리함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도 체감했다. 이 자리를 빌어 지난 10년 동안 고장 없이 잘 일해 준 전 세탁기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다. 새로 산 세탁기도 잘 관리해서 가능한 한 오래 쓰려고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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