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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연극을 봤어요.(2023.02.05.일요일)일상/일기 2023. 2. 10. 02:27
도미가 일하는 시립 극장에 가서 연극을 봤다. 오페라 극장과 연극 극장 건물이 달라서 도미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왕복 버스비까지 포함된 티켓을 도미가 그곳에서 일하는 덕분에 8유로에 살 수 있었다.(물론 학생 할인도 있다.) 저녁 일곱 시 시작이고 30분 전에 극에 대한 간단한 설명회가 있다 그래서 일찍부터 나갈 준비를 서둘렀다. 연극을 마지막으로 봤던 게 언제더라? 아침부터 왠지 설레는 기분이었다. 오페라는 몇 번인가 봤는데 역시 뮤지컬과 달리 클래식으로 만든 옛날 극을 상영하는 거라 재해석을 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보수적인 접근이 많아서 딱히 취향에 맞지 않았다. 그리고 노래하는 대사가 아무래도 모국어가 아니다 보니 배우가 노래할 때마다 배우의 연기 대신 무대 양쪽에 있는 모니터에서 나오는 텍스트를 읽기 바빴다. 한국에 있을 때는 전혀 관심 없었는데 다음에 한국에 가면 뮤지컬이나 연극을 보러 가고 싶다.
이번에 본 연극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레히니츠Rechnitz라는 도시에서 있었던 무차별 혐오 살인 사건과 1999년부터 2011년까지 벌어진 NSU의 외국인 연쇄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독일의 혐오세력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현재까지 어떤 식으로 이어져 오고 있는지를 주제로 다룬 연극이었다. 레히니츠 살인사건은 1945년 나치들이 파티를 벌이던 도중 술에 취해 180명의 유대인 강제노동자들을 학살한 사건이고, NSU는 그릇된 극우적 신념을 기반으로 10명의 외국인을 살해하고 경찰을 포함한 많은 부상자를 낸 독일의 네오나치 테러집단이다. 이 연극은 특히 레히니츠 사건의 가해자들이 끝내 정당한 처벌을 받지 않고 흐지부지 끝났다는 점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 결과가 2000년대의 네오나치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외국인 혐오 살인이라고 주장하면서 궁극적으로는 관객들에게 당신들의 책임과 역할을 생각하게 한다.
도미가 일하면서 이 연극을 한 번 보고는 내가 흥미있어 할 것 같다며 추천했는데 역시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흥미로웠다. 그리고 연극을 보고 나서는 주제뿐 아니라 극의 연출과 무대 디자인까지 여러 가지로 모두 잘 만든 연극이었다. 배우 6명이 다양한 배역을 소화하하는 점과 단순하지만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했던 무대 연출(극의 각 장에서 쓰인 무대장치가 나중에 하나의 집 모양을 이룬다.) 등이 잘 어울렸고, 스모그, 여러 색의 빛, 소음, 담배까지ㅋㅋㅋ 여러 감각을 건드리는 장치도 나쁘지 않았다. 그저 담배는 한국에서라면 사용하기 힘들지 않았을까 싶다. 간접흡연에 예민한 사람은 연극 보다가 담배 냄새를 맡는 경험이 달갑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소음. 여러 번의 소음이 있었는데, 한 번은 극 초반에 독일 현대 이전의 시기의 보수적인 독일인들을 연기하는 배우들이 갑자기 내 쪽을 보면서 "우리는 여기 살고, 너희는 저기 살아."라고 아주 흉악한 얼굴로 고함을 치는데, 너무 트리거 눌려서 거의 울 뻔했다. 내가 관객 중 유일한 아시안이긴 했지만, 날 보고 그런 것은 당연히 아니고 우연인지 뭔지 내 뒤에 관객을 연기하는 배우 두 명이 있었고 그들이 결국 퇴장하는 연출이었다. 그 뒤에도 총이 나오기도 하고, 죽은 유대인들을 묻은 피 묻은 삽으로 총소리를 연상시키게 바닥을 180번 쿵 쿵 내리치는 장면도 있었는데, 강렬하면서도 한 편으로 심신 미약자들은 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밖에도 연극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장치를 적극적으로 사용했는데, 하나는 관객을 연기하는 배우(극 시작할 때 배우가 어떤 한 문장을 관객에게 읽도록 시키는데 그 관객이 배우였다. 깜빡 속았음.)가 있고, 다른 또 하나는 레히니츠라는 도시를 찍은 영상을 배경으로써 뿐 아니라 아예 극 중 한 씬으로 등장시킨 것이다. 그리고 고양이를 포함한 다양한 배역을 소화하는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3시간을 소요하는 꽤 긴 장편의 극이었고 중간에 휴식시간이 한 번 있었는데 나는 전혀 길다고 느끼지 못했다. 심각한 주제지만 유머도 있었다.(내 부족한 독일어 실력으로는 100프로 다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극의 내용을 따라가기에는 무리없었다.) 그 밖에도 상영관이 2층에 있었는데, 올라오는 계단에는 1945년 이후 현재까지 독일 내에서 혐오살해 당한 외국인 희생자의 이름이 한쪽 벽을 빼곡히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관객들은 대부분 독일인으로 보였고 중장년 층이 많았다. 극 중반에 한 번 관객의 호응을 유도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나를 포함한 관객들 중 누구도 대답하지 않아서 배우가 대신 답해야 했던 일도 있었다. (배우들이 관객을 보면서 자기 대사를 치는 장면이 많아서 이게 정말 나한테 물어보는 건지 확신이 없었던 것도 있다.) 어쨌든 극이 끝났을 때는 아주 팔뚝이 터질 듯이 박수를 쳤다.
밖에 나와서 핸드폰을 보니 밤 열시 반이 넘어 있었다. 찬 공기를 맞으며 밤거리를 걷는 일도 아주 오랜만이었기 때문에 기분이 아주 좋았다. 2월 연극 편성표를 보니 오만과 편견을 로맨틱 코미디로 재해석한 연극이 상영 중이던데, 이것도 볼 수 있으면 보고 싶다. 좀 있으면 케이트 블란쳇이 주연인 타르라는 영화 보러 영화관도 한 번 가야 한다. 올 해는 영화나 연극도 자주 보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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