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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엄마랑 통화했어(2022.01.29.토요일)
    일상/일기 2022. 1. 30. 16:56

    바람이 심하게 불고 엄청 추운 하루였다. 하루종일 빛이 들어오는 시간이 없는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보며 걷고 또 걸었다.

     

     

    부엌 싱크대를 새로 사서 그것을 넣을 작업대를 새로 맞춰야 했고 오늘이 그 일을 하기로 한 날이다. 나는 엄마와 통화 후 심란해진 마음을 혼자 어쩌지 못하고 종일 도미에게 틱틱거렸고 도미는 영문도 모른 채 하지만 언제나처럼 성숙한 자세로 (그런 나를 놀리면서) 받아 주며 작업대 모양 선택권을 나에게 전적으로 양도하겠다고 했다. 둘이서 할 일이 많은 하루였다.

     

    도착하자마자 빠르게 부자재를 장바구니에 담고 마지막으로 작업대를 고르러 갔다. 하지만 1시간이 넘게 이것저것 비교해 보다가 나는 그냥 지쳐 버렸다. 다 똑같았다. 너무 많은 종류의 무늬와 색, 감촉을 플라스틱 코팅지로 그럴듯하게 모방한 똑같은 합판이었다. 다 똑같은 거 아무거나 고르자 마음먹고 다시 봐도 매일 봐야 하는데 밝은 색이 좋을지 어두운 색이 좋을지, 지금 부엌에 있는 다른 것들과 조화로운 게 무엇일지 가만히 서서 머릿속으로 열심히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시간만 보내게 되었다. 그렇게 겨우 이거다 싶은 것을 찾고 나면 그럴싸하게 모방된 패턴이 계속 거슬렸다. 우리 처음 이사 들어올 때는 어떻게 골랐지? 그때도 여기에서 샀는데... 결국 도미에게 후보 2-3개를 주고 그중 고르라고 한 뒤 그와 다른 것을 골랐다. 심보도 이런 심보가 없다. 

     

    싱크대가 들어갈 구멍을 파야 해서 기술자에게 사이즈와 위치를 알려 주고 어떤 합판으로 할 것인지 가리키는 순간까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찝찝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기술자는 구멍을 파는 일은 주말이 지난 뒤에 끝낼 수 있다며 3-4일 뒤에 다시 오라고 했다. 망할 독일... 또 일을 두 번 시키는구나. 

     

    파트너도 이쯤되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합판 하나 고르는 데에 2시간을 소비하고 있으려니, 이 시간까지 먹은 거라곤 도넛 하나밖에 없었다. 겨우 일을 맡겨 놓고 근처 마트에 들러 인스턴트 피자를 사려고 했는데 이 지점에는 비건 피자를 팔지 않았다. 집으로 가는 버스는 20분 배차 간격이었고 차가운 바람은 1분 1초가 멀다 하고 볼때기를 무자비하게 때렸다. 우리는 차라리 걷기로 했다. 가는 길에 있는 다른 마트에서 피자를 사자.

     

    "진아, 오늘 무슨 일 있었어?"

    "..."

    "오늘 아침에 나 자고 있을 때 뭐 했어?"

    "..."

    "진아!"

    "엄마! 엄마랑 통화했어!"

     

    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나 여기서 울기 싫어."

     

    도미는 대충 짐작이 간다는 듯 내가 눈물 훔치는 모습을 보지 않으려 얼굴을 돌려 다른 곳을 봤다. 

     

    "우리 오늘 맛있는거 먹자."

    "좋아."

    "나 사실 아까 도넛 하나 먹은 거 그게 오늘 내가 먹은 전부야."

    "뭐? 헐, 그러고 보니 그렇네!? 배고프다고 빨리 가자고 얘기하지!!"

    "따끈한 쥬스자우어쥬페(Süßsauersuppe) 한 그릇 먹으면 될 것 같아."

    "빨리 가자."

     

    중식당 불은 꺼져 있었다. 

     

    "저기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갈까? 치즈 빼고 주문할 수 있을 거야."

    "토끼 요리를 판대. 가고 싶지 않아."

    "여기 독일 남부지역요리를 파는 레스토랑이 새로 생겼는데 비건 메뉴가 있어!"

    "근데 파스타네. 것도 비건치즈도 없는."

    "와... 이건 내가 봐도 너무하다. 파스타라니. 이 많은 메뉴 중에 고작 두 개 있는 게 다 파스타..."

    "우리 그냥 집에 가서 인스턴트 피자 먹자."

    "왜 중식당은 문을 닫아가지고! 나 쥬스자우어주페 생각에 들떴었는데."

     

    우리는 비건피자가 있을 것이 틀림없는 마트에 가서 인스턴트 피자를 사고 콜라바이쩬비어(콜라랑 바이쩬비어를 섞어 마시는 맥주)를 위해 콜라와 바이쩬비어를 샀다. 나는 처음 보는 비건 아이스크림이 5-6가지 종류나 되는 것을 보고 종류별로 하나씩 다 담았다.

     

    "이 추운 날에 아이스크림?"

    "날씨가 추우니까 가는 길에 녹지 않을 거야."

     

    마트에서 집까지 가는 버스도 꽤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해서 걸어서 가기로 했다. 춥고 배고팠지만 아무도 없는 조용한 숲길을 걸으니 기분이 나아졌다. 숲을 통과하니 차도 너머로 보험회사에서 지은 높은 타워가 보였다.

     

    "저 근처가 우리 집인데 분명 이렇게 빙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지름길이 있을 텐데."

     

    이 얘기를 하면서 보니 정말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샛길이 있었다. 스포츠 클럽과 과일을 파는 노점이 있는 사이에 난 작은 길이었다. 

     

    "가볼까?"

    "배고프다며."

    "분명 집으로 가는 길로 연결되어 있을 거야. 가보자."

    "그래! 언제나 새로운 길이 있기 마련이지! 가자!"

     

    나는 올 해가 시작하기 바로 전 새해 인사와 함께 다니던 회사를 나왔다. 쉬면서 앞으로 무엇을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최근에 관심 가는 일 중에 실현 가능한 일로 선택지를 좁혀 놨지만 아직 확신을 못해서 결정을 미루고 있는 중이었다. 평소대로라면 도미에게 눈을 흘기며 그냥 가던 길로 가자고 할 나였지만 오늘은 왠지 가보고 싶었다. 길 입구는 딱 차 한 대가 통과할 수 있을 정도의 폭이었고 젖은 낙엽이 바퀴 자국 사이로 쌓여 있었다. 딱 봐도 사람이 다니는 길은 아니었다. 왼쪽에는 파낸 흙이 높이 쌓여 있었는데 그 색이 다양했다. 

     

    "저 색 좀 봐. 여기 흙 좋을 것 같다. 이게 부엽토가 아니면 뭐야?"

     

    조금 더 가보니 여기저기 바퀴 자국이 깊게 파여 울퉁 불퉁한 공터가 나왔다. 공사 중이었다. 옆에는 축구장과 테니스장, 탁구대가 있었다. 우리는 스포츠 클럽 안에 들어와 있었다. 

     

    "여기 나가는 곳이 있을까? 이쯤에서 그냥 돌아가자."

    "아냐, 분명 통하는 길이 있을 거야. 내가 먼저 갈게."

     

    도미는 끌고 가던 바퀴 달린 장바구니를 아예 들고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하늘은 짙은 회색이었고 풍경은 명도와 채도를 잃었다. 슬슬 다리가 아파 왔다. 공사 중인 터를 지나 타워가 있는 방향으로 가니 클럽 내에 있는 식당이 보였지만 문을 닫은 것 같았고 그 옆에 있는 입구의 커다란 출입문도 닫혀 있었다. 

     

    "우리 돌아가는 게 맞는 것 같아."

    "저기까지만 가보자. 분명 있을 것 같은데."

     

    출입문 옆으로 또 작은 샛길이 있었고 나는 걸음을 멈춰 도미가 신호하길 기다렸다. 곧 도미가 멋쩍은 웃음을 웃으며 막다른 길이라 했다. 에휴... 인내심이 바닥난 채 돌아서는 눈길에 커다란 철문이 걸렸다. 

     

    "우리 저 문 혹시 모르니까 한 번 열어 볼까?"

    "저렇게 큰 문을 잠그지 않고 그냥 닫아 놓는다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저 문만 열면 바로 집으로 갈 수 있어."

     

    기대 없이 서 있는데 씨익 웃어 보이는 도미의 얼굴이 보였다. 

     

    "살았다!"

     

    안 그래도 어두웠던 풍경엔 한층 더 짙은 어둠이 깔렸고 어느새 가로등 노란 불빛은 켜져 있었다. 마치 온 세상에 나와 도미 둘만 있는 듯 거리는 텅 비어 있었고 가끔 풍경처럼 희미한 불빛과 함께 자전거 몇 대가 지나갈 뿐이었다. 

     

    "집에 가면 피자 먹고, 우리 자기 전에 스타트렉 보다 말았던 거 다시 정주행 할까?"

    "감자칩도 뜯자."

    "콜라바이쩬이랑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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